론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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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론 테일러는 미국의 배우, 가수, 뮤지컬 배우로, 1952년에 태어나 2002년에 사망했다. 그는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스'에서 오드리 2세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이름을 알렸으며, '심슨 가족'에서 재즈 음악가 "블리딩 검스 머피"의 목소리 연기로도 유명하다. 또한 '스타 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 '트윈 픽스' 등 다수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테일러는 뮤지컬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를 제작하고 주연을 맡아 토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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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테일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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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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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널드 제임스 테일러 |
출생 | 1952년 10월 16일 |
출생지 | 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 |
사망 | 2002년 1월 16일 (향년 49세)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직업 | 배우, 가수, 작가 |
배우자 | DeBorah Sharpe (1980년 결혼) |
자녀 | 1명 |
활동 기간 | 1977년–2002년 |
2. 생애
테일러는 1977년, 도로시 역의 언더스터디로 출연했던 ''오즈의 마법사'' 제작 과정에서 데보라 샤프를 만났다.[27] 두 사람은 1980년에 결혼하여 아들 아다마를 낳았다.[27][23]
테일러는 여가 시간에 뉴저지에 있는 조지 스트리트 플레이하우스(George Street Playhouse)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것을 돕곤 했다.[3][7] 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감사하며 "어떤 것들이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 경력에 축복이 있었고,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라고 언급했다.[23] 1995년 ''더 플레인 딜러''(The Plain Dealer)에 실린 기사에서는 테일러를 "유쾌한 거인, 자연의 힘처럼 보이는 사람 - 어쩌면 훌륭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산과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23] 테일러는 기독교인이었다.[13]
테일러는 1999년에 작은 뇌졸중을 겪었지만, 73일 후에 ''잇 에인'트 낫씽 벗 더 블루스''(It Ain't Nothin' But the Blues) 공연에 복귀하며 회복력을 보여주었다.[13] 그러나 2002년 1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였다.[27] 그의 장례식은 같은 해 1월 28일 뉴 크라이스트 기념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행되었다.[27][7]
2. 1. 어린 시절
테일러는 1952년 10월 16일, 텍사스주 갈베스턴에서 매리언과 로버트 "브루노" 테일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로베르타와 프랜시스라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27][1][4][2] 그는 오코넬 고등학교를 다녔고,[3] 와튼 카운티 주니어 칼리지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학교 합창단과 연극에도 참여했다. 합창단 선생님은 그가 The Temptations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우연히 듣고 그에게 합창단 가입을 권유했다.[27] 그는 미식축구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고, 19세에 가수가 되기 위해 뉴욕의 미국 연극 아카데미에 진학했다.[27][4][23]2. 2. 배우 활동
"풍성한 베이스 바리톤 목소리"로 묘사되는[4] 테일러는 뮤지컬 극장에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아메리칸 드라마틱 아트 아카데미를 졸업했지만, 악보를 읽지 못하고 피아노도 겨우 칠 수 있는 수준이었음에도 가수로 활동했다.[4] 1977년에는 뮤지컬 ''더 위즈''의 전국 순회 공연에서 겁쟁이 사자 역할을 맡았다.[27][4][23] 이후 1978년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유비!''에서 그레이트 빅 베이비 역을,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 공연에서는 가야바 역을 연기했다.[5]테일러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82년 하워드 애시먼과 앨런 멘켄이 만든 블랙 코미디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스''의 오리지널 오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금성 파리지옥과 아보카도를 의인화하여 교배한 듯한"[27][5][6][7] 모습의 말하는 식인 식물 '오드리 2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오드리 2세는 극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커지는 네 개의 인형으로 표현되었는데, 인형 조종은 마틴 P. 로빈슨이 맡았다.[4][5] 테일러는 무대 뒤 상자 안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고, 노래할 때만 일어섰다.[4][5] 테일러와 로빈슨은 "목소리와 움직임이 항상 일치하도록"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이러한 "친밀감" 덕분에 "캐릭터가 진정으로 살아 숨 쉴 수 있었다".[5] 하지만 테일러는 상자 안에 있는 것을 답답해했는데, 관객과 단절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서는 목소리를 객석 끝까지 던질 수 있는데, 그 작은 공간에 있으면 노래할 곳이 없다고 느껴진다"고 토로했다.[5] 이 역할은 테일러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뉴욕 타임스''는 "테일러 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딱 맞는 역할"이라고 평가했으며, 그의 "Feed me, feed me!영어(먹여줘, 먹여줘!)"라는 대사는 오드리 2세의 상징이 되었다.[4] 사람들은 길에서 테일러를 보면 이 대사를 외치곤 했다.[5] ''리틀 샵 오브 호러스''는 1987년 막을 내릴 때까지 2,000회 이상 공연되었다.[4][26] 테일러는 이 역할로 1983년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에서 로빈슨과 함께 뛰어난 특수 효과 부문 상을 받았다.[7][8]
1984년에는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공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세 개의 머스킷티어''에서 삼총사 중 한 명인 포르토스 역을 맡았다.[23][10] 그러나 이 작품은 15번의 시범 공연 후 단 9회 공연 만에 막을 내렸다.[9] 프랭크 리치는 테일러와 동료 배우들(브렌트 스피너, 척 와그너)이 "전문적으로 연기했다"고 평하면서도, "대사가 거의 없고 종종 세 얼간이의 대역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10]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윌리엄 B. 콜린스 역시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좋은 대본 없이 좌초된 코미디언처럼 행동한다"며 비슷한 비판을 제기했다.[11]
2. 3. 음악 활동
테일러는 아프리카 기원에서 미국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블루스 음악의 역사를 보여주는 뮤지컬 레뷔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를 제작하고 주연을 맡았다. 그는 1987년 콜로라도 덴버의 덴버 공연 예술 센터에서 가수 행크 윌리엄스에 대한 연극인 ''Lost Highway''의 제작에서 블루스 음악가 루퍼스 페인 역을 맡으면서 이 쇼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냈다. 그는 1994년에 이를 받아들인 감독 랜달 마일러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테일러는 마일러, 리타 게이더스, 찰스 베벨, 댄 휘트먼과 함께 레뷔를 공동 집필했으며[27][7][12][13] 공동 프로듀서 역할도 했다.[15] 테일러는 레뷔의 리드 싱어이자 내레이터로 활동했으며,[14] 그의 넘버에는 "I'm Your Hoochie Coochie Man", "The Thrill is Gone", "Blues Man", "Let the Good Times Roll"이 포함되었다.[15]이 쇼는 처음에는 지역 고등학교 25곳에서 45분 분량으로 공연되었다.[13]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쇼는 두 시간으로 확장되었고 50곡이 추가되었으며, 4명의 오리지널 출연진에 3명이 추가되어 덴버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었다.[27][23] 테일러는 이 공연에 대해 "매우 정중"하며 관객들이 공연자와 가깝고 "노래 때문에, 그 내용 때문에 한 쇼는 결코 다음 쇼와 같지 않다. 블루스는 오늘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은 우울하고, 다른 날은 정말 행복하고 들뜬다. 우리 모두 웃고 있다. 랜디의 연출은 그것을 포착한다. 항상 매우 개인적이어서 관객을 이 작품으로 끌어들인다."고 설명했다.[23] 아프리카 음악뿐만 아니라 레뷔에는 "컨트리, 가스펠, 옛 블루스, 애팔래치아 음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치 클라인, 브렌다 리, 마할리아 잭슨,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머디 워터스의 음악이 실렸다.[23]
1995년, 레뷔는 록앤롤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 개관과 함께 클리블랜드 플레이 하우스에서 한 달 동안 공연되었고,[23] 이후 다른 지역 극장에서 투어했다.[4] 1998년 11월 뉴저지의 크로스로드 극장에서 7주 동안 공연되었으며[13] 1999년 3월 뉴욕의 뉴 빅토리 극장에서 오프브로드웨이로 개막했고,[4] 샌디에고 레퍼토리 극장 및 앨라배마 셰익스피어 페스티벌과 협력하여 크로스로드 극장이 제작했다.[12] 비평가와 관객의 찬사를 받았으며 다음 달에는 비비안 보몬트 극장으로 브로드웨이로 옮겨졌다.[13][17] ''뉴욕 타임스'' 평론가 로렌스 반 겔더는 쇼가 "훌륭하게 해석된 노래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각적 웅변과 역사적 범위의 강력한 조화이며, 노래는 귀를 달래주고, 때로는 웃음보를 자극하며, 항상 정신을 고양시킨다"고 썼다.[12]
보몬트에서 개막한 지 일주일 만에 이 쇼는 4개의 토니상 후보에 올랐으며, 테일러는 뮤지컬 부문 남우조연상과 뮤지컬 부문 최우수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27][16] CBS에서 열린 토니상 쇼에서 출연진의 공연은 시간 제약으로 인해 취소되었고, 이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쇼에 잠재적인 수익을 잃게 하고, 생존 전망을 손상시켰다.[13] 이틀 후 출연진은 CBS 토크쇼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서 공연했으며,[27] 토니상의 무시와 관련된 언론의 관심과 라디오 보도는 다음 2주 동안 쇼의 수익을 증가시켰다.[13]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토니상과 같은 장기적인 관객을 구축하지 못했"으며,[13] 결국 관람객 수가 줄어들었다. 제작자들은 공연을 홍보하기 위한 대규모 입소문 네트워크 캠페인을 벌였고 쇼는 앰배서더 극장으로 옮겨졌으며, 여기서 흥행 수입이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13] 이 쇼는 브로드웨이에서 총 8개월 동안 공연된 후 2000년 1월에 막을 내렸다.[4][17]
그 해 나머지 기간 동안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는 다시 지역 극장에서 투어했으며, 애틀랜타, 샌디에고, 존 F. 케네디 공연 예술 센터 (워싱턴 D.C.)에서 공연했고, 2000년 8월 뉴욕의 B.B. King Blues Club and Grill에서 한 달 동안 공연했다.[14][17] ''The Press-Enterprise''의 짐 트라제서는 샌디에고 공연에 대한 리뷰에서 테일러를 칭찬하며 "어떤 쇼, 특히 자신의 쇼를 장악할 수 있는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고 "오슨 웰스, 베이브 루스)와 같은 특정 거인들이 가진 사자 같은 남성성과 함께 놀라운 은혜와 운동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트라제서는 또한 작가진을 칭찬하며 "노래를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에 의해 많은 곡에 드리워진 거미줄을 날려버리는 편곡을 선택하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14]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는 테일러가 출연한 가장 오래 상연된 쇼이자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출연작이었다.[4] 테일러는 이 작품의 IMAX 영화 버전을 계획했고,[18] 그가 사망한 지 9년 후 뉴욕 시립 대학교 애런 데이비스 홀에서 뉴 할렘 예술 극단에 의해 부활했다.[19]
3. 작품 목록
론 테일러는 영화, 텔레비전,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폭넓은 연기 경력을 쌓았다. 특히 뮤지컬 배우로서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여러 브로드웨이 및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에 출연했다. 또한 다수의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하여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블루스 그룹 'The Nervis Bros'의 일원으로 미국 전역에서 공연했으며,[27][7] 빌리 조엘, 브루스 스프링스틴, 에타 제임스, 슬래시 및 실라 E.와 함께 노래했다.[27]
자세한 작품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영화
테일러는 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대역전, 아모스와 앤드류, 행크 역을 맡은 하렘의 분노,[26] 마이티 퀸, 그리고 러시아워 2 등이 있다.[27][3][7]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83 | 대역전 | 큰 흑인 남자 | |
1984 | 아이스 파이럿 | 삐끼 로봇 | 목소리 출연; 크레딧 없음 |
1984 | 엑스터미네이터 2 | 듀드 | |
1987 | 화려한 유혹 | 첫 번째 부두 노동자 | |
1988 | 천문학 | 조니의 아버지 | 단편 영화 |
1988 | 데드 히트 | 총격전 좀비 | |
1989 | 마이티 퀸 | 맥키언 경관 | |
1989 | 콜리전 코스 | 볼링장에서의 자동차 노동자 #2 | |
1989 | 리렌트리스 | 블레이클리 대위 | |
1989 | 세컨드 사이트 | 칼 | |
1990 | 하트 컨디션 | 버바 | |
1990 | 다운타운 | 브루스 터커 | |
1990 | 매스터스 오브 메네스 | 문 앞 남자 | |
1991 | 하렘의 분노 | 행크 | |
1991 | 로버 데인저필드 | 머그시 / 브루노 | 목소리 출연 |
1992 | 내 이웃이 되어 줄래요? | 버블 맨 | |
1993 | 아모스와 앤드류 | 셔먼 | |
1993 | 데드폴 | 아기 | |
2002 | 리투얼 | 아치볼드 감독관 | (마지막 영화 역할) |
3. 2. 텔레비전
테일러는 수많은 텔레비전 배역을 맡았다. 그는 심슨 가족의 재즈 음악가 "블리딩 검스 머피"의 목소리를 연기했으며, 시즌 1 에피소드 "괴로워하는 리사"(1990)에 출연했고, 시즌 6 에피소드 라운드 스프링필드(1995)에서 캐릭터의 죽음으로 다시 등장했다.[27][20] 그는 이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21] 테일러는 시즌 2 에피소드 "Dancin' Homer"에서 그의 역할을 다시 맡을 예정이었지만, 뉴욕에 있어서 그의 파트를 녹음할 수 없었다.[26] The A.V. Club의 키스 핍스는 이 역할이 테일러에게 "텔레비전 불멸"을 선사했다고 말했다.[24] 그는 또한 1990년 앨범 The Simpsons Sing the Blues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God Bless the Child" 녹음에 참여했다.[22]그는 스타 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에서 클링온 요리사로 출연했으며,[23] 트윈 픽스에서 레슬링 강사 코치 윙게이트를 연기했다.[24] 다른 텔레비전 배역으로는 NYPD 블루, ER, 프로파일러, Family Matters, 홈 임프루브먼트 및 Ally McBeal에 게스트로 출연했다.[27][4][3][7][26][25] 테일러는 또한 2000년 시리즈 시티 오브 엔젤스에서 반복적인 역할을 맡았고,[27] 매틀록의 두 부분으로 된 에피소드에서 블루스 가수를 연기했는데, 이는 그를 위해 쓰여진 역할이었다.[26]
1991년 L.A. Law 시리즈에 출연하여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의 공연을 "과장"했다는 이유로 야구팀에서 해고된 가수를 연기한 후, 테일러는 스포츠 행사 전에 이 노래를 부르라는 몇 번의 초대를 받았다.[26] 그는 1991년 7월 1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기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국가를 불렀다. 그의 공연은 그의 캐릭터를 모방하지 않았으며, "이 노래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냥 이 노래를 솔직하게 부를 것이고 그게 전부입니다."라고 말했다.[26] 테일러는 여행 및 숙박 비용을 받았지만 그의 공연에 대한 다른 지불은 없었다.[26] 그는 또한 로스앤젤레스 킹스 내셔널 하키 리그 경기를 위해 노래했으며,[26] 1995년 8월 5일, 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간의 MLB 경기 전에 국가를 불렀다.[23]
3. 3. 뮤지컬
"풍채 좋은 베이스 바리톤"[4]으로 묘사되는 테일러는 뮤지컬 극장에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아메리칸 드라마틱 아트 아카데미를 졸업했지만 악보를 읽지 못하고 피아노도 "겨우" 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가수로 활동했다.[4] 1977년에는 전국 순회 공연작인 ''더 위즈''에서 겁쟁이 사자 역을 맡았고,[27][4][23] 1978년에는 브로드웨이 작품 ''유비!''에서 그레이트 빅 베이비 역,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 공연에서는 가야바 역을 연기했다.[5]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82년 하워드 애시먼과 앨런 멘켄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거칠고, 펑키하며, 음흉한" 말하는 살인 식물 오드리 2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이 캐릭터는 "금성 파리지옥과 아보카도를 의인화하여 교배한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27][5][6][7] 오드리 2세는 마틴 P. 로빈슨이 조종하는 네 개의 점점 커지는 인형이었고, 테일러는 목소리 연기를 위해 무대 뒤 상자 안에 앉아 있었고, 노래할 때는 일어서서 공연했다.[4][5] 두 사람은 "목소리와 행동이 항상 동기화"되도록 하기 위해 가까이 있었고, "캐릭터가 진정으로 꽃피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인 "친밀감"을 형성했다.[5] 테일러는 상자 안에 앉는 것을 싫어했는데, 관객과 단절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5] 이 역할은 그의 돌파구였으며, ''뉴욕 타임스''의 제시 맥킨리는 "테일러 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딱 맞는 역할...[그는] 곧 오드리의 대표 대사인 '먹여줘, 먹여줘!'(Feed me, feed me!)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고 묘사했다.[4] 대중들은 테일러를 보면 종종 이 대사를 사용했다.[5] ''리틀 샵 오브 호러스''는 1987년에 막을 내리기 전 2,000번 이상 공연되었고,[4][26] 1983년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에서 테일러는 로빈슨과 함께 그의 연기에 대한 뛰어난 특수 효과 부문 상을 수상했다.[7][8]
1984년 브로드웨이 극장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인 브로드웨이 극장의 ''세 개의 머스킷티어''에서 테일러는 세 명의 타이틀 캐릭터 중 하나인 포르토스 역할을 맡았다.[23][10] 15번의 시연 공연 후, 이 쇼는 9번만 공연된 후 막을 내렸다.[9] 프랭크 리치는 머스킷티어들이 테일러와 그의 공동 출연자 브렌트 스피너, 척 와그너에 의해 "전문적으로 연기되었다"고 썼지만, 세 사람은 "대사가 거의 없고 종종 세 얼간이의 대체 인물처럼 보인다"고 느꼈다.[10]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윌리엄 B. 콜린스는 그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좋은 자료 없이 좌초된 코미디언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면서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11]
테일러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 성공하기까지 블루스 음악의 역사를 보여주는 뮤지컬 레뷔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를 제작하고 주연을 맡았다. 그는 1987년 콜로라도 덴버의 덴버 공연 예술 센터에서 가수 행크 윌리엄스에 대한 연극인 ''Lost Highway'' 제작에 블루스 음악가 루퍼스 페인 역으로 참여하면서 이 쇼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다. 그는 1994년에 이를 받아들인 감독 랜달 마일러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테일러는 마일러, 리타 게이더스, 찰스 베벨, 댄 휘트먼과 함께 레뷔를 공동 집필했으며[27][7][12][13] 부프로듀서 역할도 했다.[15] 테일러는 레뷔의 리드 싱어이자 내레이터로 활동했으며,[14] 그의 넘버에는 "I'm Your Hoochie Coochie Man", "The Thrill is Gone", "Blues Man", "Let the Good Times Roll"이 포함되었다.[15] 이 쇼는 처음에는 지역 고등학교 25곳에서 45분 분량으로 공연되었다.[13]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쇼는 두 시간으로 확장되었고 50곡이 추가되었으며, 4명의 오리지널 출연진에 3명이 추가되어 덴버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었다.[27][23]
테일러는 이 공연에 대해 "매우 정중"하며 관객들이 공연자와 가깝고 "노래 때문에, 그 내용 때문에 한 쇼는 결코 다음 쇼와 같지 않다. 블루스는 오늘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은 우울하고, 다른 날은 정말 행복하고 들뜬다. 우리 모두 웃고 있다. 랜디의 연출은 그것을 포착한다. 항상 매우 개인적이어서 관객을 이 작품으로 끌어들인다."고 설명했다.[23] 레뷔에는 아프리카 음악뿐만 아니라 "컨트리, 가스펠, 옛 블루스, 애팔래치아 음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치 클라인, 브렌다 리, 마할리아 잭슨,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머디 워터스의 음악이 실렸다.[23]
1995년, 레뷔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박물관 개관과 함께 클리블랜드 플레이 하우스에서 한 달 동안 공연되었고,[23] 이후 다른 지역 극장에서 투어했다.[4] 1998년 11월 뉴저지의 크로스로드 극장에서 7주 동안 공연되었으며[13] 1999년 3월 뉴욕의 뉴 빅토리 극장에서 오프브로드웨이로 개막했고,[4] 샌디에고 레퍼토리 시어터 및 앨라배마 셰익스피어 페스티벌과 협력하여 크로스로드 시어터가 제작했다.[12] 비평가와 관객의 찬사를 받았으며 다음 달에는 비비안 보몬트 시어터로 브로드웨이로 옮겨졌다.[13][17] ''뉴욕 타임스'' 평론가 로렌스 반 겔더는 쇼가 "훌륭하게 해석된 노래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각적 웅변과 역사적 범위의 강력한 조화이며, 노래는 귀를 달래주고, 때로는 웃음보를 자극하며, 항상 정신을 고양시킨다"고 썼다.[12]
보몬트에서 개막한 지 일주일 만에 이 쇼는 4개의 토니상 후보에 올랐으며, 테일러는 뮤지컬 부문 남우조연상과 뮤지컬 부문 최우수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27][16] CBS에서 열린 토니상 쇼에서 출연진의 공연은 시간 제약으로 인해 취소되었고, 이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쇼에 잠재적인 수익을 잃게 하고, 생존 전망을 손상시켰다.[13] 이틀 후 출연진은 CBS 토크쇼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서 공연했으며,[27] 토니상의 무시와 관련된 언론의 관심과 라디오 보도는 다음 2주 동안 쇼의 수익을 증가시켰다.[13]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토니상과 같은 장기적인 관객을 구축하지 못했"으며,[13] 결국 관람객 수가 줄어들었다. 제작자들은 공연을 홍보하기 위한 대규모 입소문 네트워크 캠페인을 벌였고 쇼는 앰배서더 극장으로 옮겨졌으며, 여기서 흥행 수입이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13] 이 쇼는 브로드웨이에서 총 8개월 동안 공연된 후 2000년 1월에 막을 내렸다.[4][17]
그 해 나머지 기간 동안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는 다시 지역 극장에서 투어했으며, 애틀랜타, 샌디에고, 존 F. 케네디 공연 예술 센터 (워싱턴 D.C.)에서 공연했고, 2000년 8월 뉴욕의 B.B. 킹 블루스 클럽 앤 그릴에서 한 달 동안 공연했다.[14][17] ''The Press-Enterprise''의 짐 트라제서는 샌디에고 공연에 대한 리뷰에서 테일러를 칭찬하며 "어떤 쇼, 특히 자신의 쇼를 장악할 수 있는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고 "오슨 웰스, 베이브 루스)와 같은 특정 거인들이 가진 사자 같은 남성성과 함께 놀라운 우아함과 운동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트라제서는 또한 작가진을 칭찬하며 "노래를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에 의해 많은 곡에 드리워진 거미줄을 날려버리는 편곡을 선택하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14]
''It Ain't Nothin' But the Blues''는 테일러가 출연한 가장 오래 상연된 쇼이자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출연작이었다.[4] 테일러는 이 작품의 IMAX 영화 버전을 계획했고,[18] 그가 사망한 지 9년 후 뉴욕 시립 대학교 애런 데이비스 홀에서 뉴 할렘 아트 시어터에 의해 부활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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